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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식(曺植)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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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건중(健仲)
호(號)남명(南冥)
시호(諡號)문정(文貞)
생년1501(연산군 7)
졸년1572(선조 5)
시대조선전기
본관창녕(昌寧)
활동분야학자 > 유생
조언형(曺彦亨)
이씨(李氏)
증조부조안습(曺安習)
출신지경상도 삼가현
저서『남명집(南冥集)』
저서『남명학기유편(南冥學記類編)』
저서『파한잡기(破閑雜記)』

[상세내용]

조식(曺植)
1501년(연산군 7)∼1572년(선조 5).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健仲),(주1)
『기년편고(紀年便攷)』에는 자가 건중(楗仲)으로 되어 있다.
호는 남명(南冥). 생원 안습(安習)의 증손으로, 승문원판교 조언형(曺彦亨)의 아들이며, 모친은 이씨(李氏)이다.
1. 유년시절
1501년(연산군 7)경상도 삼가현 토골〔兎洞〕에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학문연구에 열중하였으나 평생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중국의 대유학자인 주자(朱子)정자(程子) 등의 초상화를 손수 그려 병풍으로 만들어 수시로 펴놓고 자신을 독려하였다. 1527년(중종 22)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하였다.

1531년 생계가 어려워 어머니를 모시고 살림이 넉넉한 처가를 찾아가 김해의 탄동(炭洞)에다 산해정(山海亭)을 지어 제자교육에 힘썼다.
2. 학문연마와 강학활동
1539년 38세에 유일(遺逸)로서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1544년 관찰사가 만나기를 청하여도 거절하였다. 1549년(명종 4)에는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에 특진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집 근처에 계복당(鷄伏堂)과 뇌룡사(雷龍舍)를 지어 강학에 전념하였다.

그뒤 1552년 종부시주부로 다시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1554년 벼슬길에 나아가라는 이황(李滉)의 권고도 거절하였다. 그뒤 1556년 단성현감, 1560년 조지서사지 등으로 부름을 여러 차례 받았지만 취임하지 않았다.

이와같이, 벼슬을 거절하고 은일로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나 그의 명성은 점점 높아만 갔다. 이에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1551년 오건(吳健), 1556년 하항(河沆), 1563년 김우옹(金宇顒), 1565년 최영경(崔永慶), 그 이듬해 정구(鄭逑) 등이 찾아와 사사하였다. 1561년 지리산덕천동(德川洞)으로 이거하여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강학에 더욱 힘썼다.

1567년 5월 왕이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같은해 8월에 상서원판관에 임명하여 두번씩이나 부르자 입조하였으나 왕을 만나 치란(治亂)에 관한 의견과 학문의 도리를 표하고 낙향하였다. 그뒤에도 여러 차례 부름을 받았지만 나아가지 않았고, 오직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만 힘썼다.
3. 학문적 견해
그는 학문을 알기만 하면 족한 것이 아니라 반궁체험(反躬體驗)과 지경실행(持敬實行)이 더욱 중요한 것이라 주장하였다. 그는 특히 경의(敬義)를 높였는데, 마음이 밝은 것을 ‘경(敬)’이라 하고 외적으로 과단성이 있는 것을 ‘의(義)’라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바로 ‘경’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써 외부생활을 처리하여나간다는 의리철학 또는 생활철학을 표방한 것이다. 그는 특히 실천궁행을 가장 강조하였는데, 그의 일상생활에서도 철저한 절제로 일관하여 불의(不義)와는 일체 타협하지 않았다.

그는 독서할 때마다 몸에 긴요한 것이 있으면 이를 기술, 편찬하였다. 이것이 『학기유편(學記類編)』인데, 그는 이 『학기유편』을 통하여 도(道)의 체통(體統)을 말하고 학문하는 방법과 논심(論心)의 요경 및 수신(修身)의 방법과 치국의 도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삼재태극도(三才太極圖)‧성위태극도(誠爲太極圖)‧천인일리도(天人一理圖) 등 10여종의 도해(圖解)를 붙여 어려운 이학(理學)을 설명하였다.

그는 또 초심자(初心者)에게 『심경(心經)』『서명(西銘)』『태극도설(太極圖說)』 등 심성(心性)에 관한 문장을 가르치는 이황의 교육방법을 반대하고, 『소학』『대학』『논어』와 같은 실천적인 경전을 먼저 가르쳐야 하고 교수방법도 스스로 터득하는 길을 택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4. 이황과의 관계
한편, 그는 경상좌도의 거유(巨儒) 이황과 같은 시대에 살면서 경상우도를 대표하는 대유학자로 쌍벽을 이루었다. 두 거유는 직접 만날 기회는 없었으나 서신으로 서로 안부를 물어 우의를 돈독히 하였지만, 학문적으로는 약간의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 그러나 경상도의 학자들은 두 사람을 모두 존경하여 두 문하를 번갈아 출입하는 자가 많았다. 특히, 정구김우옹정탁(鄭琢) 등이 그 대표적인 학자라 하겠다.

그러나 그의 수제자격인 정인홍(鄭仁弘)만은 이황에게 출입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두 거유의 견해차이를 들어 상당한 마찰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물론, 자기의 스승을 높이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뒤에 이언적(李彦迪)과 함께 이황이 문묘에 배향되자 이황과 이언적의 출향(黜享)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두 계열의 문하생들이 친밀한 관계로 지내다가 때로는 소원해진 사이가 되기는 하였으나, 후기에 오면 경상도의 두 학자를 서로 추장(推奬)하는 모습으로 바뀌어갔다.
5. 문인풍과 학풍
조식의 대표적인 문인들을 살펴보면 정구‧곽재우(郭再祐)정인홍김우옹이제신(李濟臣)김효원(金孝元)오건강익(姜翼)문익성(文益成)박제인(朴齊仁)조종도(趙宗道)곽일(郭𧺝)하항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한국유학사에서 크게 세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 이들은 대부분 은둔적인 학풍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그가 벼슬길에 나오지 않고 학문에 몰두한 행적이 그대로 제자들에게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둘째, 경상좌도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경상우도의 학풍을 대표하였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진주 등지에 거주하면서 유학을 진흥시키고 문풍(文風)을 일으킨 지역문화의 기수들이라 하겠다.

셋째, 국가의 위기 앞에 문인으로 몸소 앞장서 싸움에 참여하였다는 점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의 의병활동에 참여, 국가의 위기 앞에 투철한 선비정신을 보여주었다. 즉, 그들은 국가의 위란 앞에 학자의 몸으로 수수방관하지 않고 직접 몸을 던진 참여정신이 투철한 자들이었다. 이러한 정신과 모습은 조선 말기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6. 사후의 상황
선조대사간에 추증되고, 1615년(광해군 7) 영의정이 더하여졌다. 진주덕천서원(德川書院), 김해신산서원(新山書院), 삼가용암서원(龍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남명집』『남명학기유편(南冥學記類編)』『파한잡기(破閑雜記)』 등이 있으며, 작품으로 「남명가」‧「권선지로가(勸善指路歌)」가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國朝人物志
燃藜室記述
淸選考
南冥集
寒岡集
南冥 曺植과 南冥學派(李樹健, 民族文化論叢 2‧3合輯, 1982)
南冥의 反躬體驗과 持敬居義思想의 硏究(崔丞灝, 韓國의 哲學 11, 1983)

[집필자]

송찬식(宋贊植)

명 : "식(植)"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國朝人物志v2家無以爲食則所遺子孫者安而已歷事兩君賢勞獨勤而位不過三品則其不苟阿世取榮者可知矣人物考子號南冥見下
國朝人物志v2召不起明宗特拜丹城縣監又不起明年拜尙瑞院判官就徵卽還山辛未宣祖遣中貴人問之已卒贈領相諡文貞眉叟記言名其所築亭曰山海舍曰雷龍最後得頭流山入水窟雲洞架八
國朝人物志v2恃只恃草屋數間壬申爲北道兵使諸胡相戒曰張將軍來鎭愼毋犯邊生事在梁山往謁南冥曺植奇之曰百世之下復見夷齊禦下卒以嚴或謂過當弼武曰夫好生惡死人之常情驅惡死之人以赴死地不敢逗留
國朝人物志v2參奉不就陞義興三嘉皆不就拜昌寧縣監上引見問李曺學問對曰滉踐履篤實工夫純熟超然自得特立獨行爲江原監司築鴒原城修元天錫墓朴應犀上變告國舅金悌男推戴永昌
國朝人物志v2字和甫號竹閣陜川人淸香堂源從子早遊南溟曺植門對中庸章句極詳盡無遺喜曰不圖汝之曉解如此安貧樂道不爲物欲所累時在要路者欲授官力辭不赴與崔永慶鄭逑河沆爲道
國朝人物志v2字守夫宗室也性癖山水名勝之地足迹殆遍從曺植學世稱豪傑之土士曰花色場中挺有如公者幾人耶所憂只在汗血之行而中道止也晩年與東岡南彥經甚密深憤彥
國朝人物志v2字伯玉號雲江林川人判書李俊民以女妻之文科歷仕淸顯官至承旨從曺植學許以嘉士東儒師友錄有三子希哲希逸希進俱有文名著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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